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온건파의 실패 ==== 하루 쉬고 24일 아침 여수 수복작전이 개시되었다.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인 송호성은 이승만, 이범석과 다르게 온건한 진압을 주장했다. 당시 부산일보에서는 > 25일 직접 교전중의 여수읍내까지 출동하여 상황을 시찰한 육군 총참모장 宋虎聲장군은 동 시가전투가 반군진압작전으로부터 완전한 봉기시민 소탕으로 변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였는데, 동 장군은 시민의 그 같은 저항의식을 의외로 생각하고 동시에 금반 전투의 막대한 물적 손실을 개탄하였다. '''동 장군은 공격에 앞서 3차례나 삐라를 뿌리는 등 반군측과 양민을 분리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는 반도측 보안대의 방해로 말미암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25일의 제1일 공격에서 장갑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부대가 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건물 안으로부터의 사격이 여전히 맹렬하였음 >부산신문 1948년 10월 31일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1&itemId=d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4&levelId=dh_008_1948_10_27_0070|#]] 1960년대 일본 역사학자는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여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 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 >하야시 히데키(林英樹), 內側 見 朝鮮戰爭 民族問題硏究會 編 朝鮮戰爭史 評論社 , 1967, pp.16 ~ 17 [[이명박]] 정부 시기의 진실화해에서는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 >진실화해 2010년[* 날짜에서 확인되듯 [[민주당계 정당|민주당]] 정권이 아닌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권이다.] 상반기 조사보고서, 437쪽 등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온건파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반란군측은 김지회-홍순석이 곳곳에 남겨놓은 안내원을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란의 주력부대가 여수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고 이에 차단선을 풀고 여수만 노리게 되어 반란군들은 큰 피해 없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여수의 무장 폭도 분자들도 지창수를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고 정작 여수에는 북한군이 남진하여 오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여수인민위원장 이용기 등 일부 좌파분자들만 남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